2012. 11. 4. 05:19ㆍ고운 노래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 박인환 [ 세월이 가면 ]
이 시는 70 80세대라면 누구나 잘아는 박인희의 노래로 일반에 널리 알려진 박인환의 시.
이 시를 전쟁과 무관한 소녀적 감성의 시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이 시는 전쟁의 상처를 노래하고 있다. 즉, 한국 전쟁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을 연상하며 잃어버린 사랑과 되돌아 갈 수 없는 그 때를 생각하면서 당시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랴주던 화제작이었다.
..
1956년 이른 봄 저녁 명동의 경상도집에서 박인환, 이진섭, 송지영, 영화배우 나애심이 술을 마시던자리... 술이 몇 차례 돌아가자 그들은 나애심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졸랐지만 그녀는 좀체 부르지 않았다. 그 때 갑자기 박인환이 즉석에서 시를 쓰기 시작햇다. 그 시를 넘겨다 보고 있던 이진섭도 그 즉석에서 작곡을 하고 나애심은 흥얼 흥얼 콧노래로 그 곡을 부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깨어진 유리창과 목로주점과도 같은 초라한 술집에서 즉흥적으로 탄생한 것이다.
이 노래가 1970-80년대 박인희의 곡으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세월이 가면]이다.
..
한 두 시간 후 나애심과 송지영은 돌아가고 임만섭, 이봉구 등이 합석을 했다. 이때 테너 임만섭이 이 노래를 불러 길 가는 행인들이 모두 이 술집 문 앞으로 모여드는 기상천외한 리사이틀이 열렸다고 한다.
마른 명태를 앞에다 놓고 대포잔을 기울이면서 아름다운 시를 쓰고 작곡을 하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지켜보며 박수를 보내는 많은 행인들..
마치 낭만적인 영화의 한 장면 같기도 했다. 이렇게하여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은 순식간에 명동에 퍼졌다고한다. 명동의 골목마다 스며 있는 외로움과 회상을 상징하는 듯 이곳 저곳에서 이 노래는 불리어졌다. 이 시를 쓰기 바로 전날 박인환은 첫사랑 애인이 잠들어 있는 망우리 묘지에 다녀왔다고 한다.
그의 가슴에 남아 있는 먼 애인의 눈동자와 입술이 나뭇잎에 덮여서 흙이 된 그의 사랑을 마지막으로 돌아본 것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영원히 마지막이 될 길을 가면서 이미 오래 전에 그의 곁에서 떠나간 연인의 무덤에 작별을 고하고 그 아름다운 사랑을 노래하고 싶었다. [아! 박인환, 문학예술사, 1983]
그 시대의 암울한 현실 속에 사람들의 아픔과 공허함을 이해하고 서로 공감하며 그 마음을 어루만지는 노래..
그 노래가 바로 세월이 가면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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