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1. 17. 20:27ㆍ친구글
자화상(自畵像)
나는 오랜 옛 서울의
한 이름 없는 마을에 태어나
부모형제와 이웃 사람의 얼굴, 그리고
하늘의 별들을 볼 적부터
죽음을 밥먹듯 생각하게 되었다.
아침에 피는 꽃의 빛깔과
황혼에 지는 동산의 가을소리도
이별이 곁들어져
언제나 그처럼 슬프고 황홀했다
술과 친구와 노래는 입성인 양 몸에 붙고
돈과 명예와 그리고 여자에도
한결같이 젖어들어
모든 것을 알려다
어느 것도 익히지 못한 채
오직 한 가지 참된 마음은
자기가 눈감고 이미 없을 세상에
비치어질 햇빛과
피어나는 꽃송이와
개구리 우는 밤의 어스름달과
그리고 모든 사람의
살아 있을 모습을 그려보는 일이다.
(김동리·소설가, 1913-1995)
+ 자화상(自畵像)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것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지 않을란다.
찬란히 티워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숫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서정주·시인, 1915-2000)
+ 베짱이, 나의 자화상
죽은 벌레들이 땅에 떨어져 다음 해 한여름을
위해 거름기를 모을 때 혹은 살아있는 것들을 위해
과일이 단물 들어갈 때 내 삶은
어느 한 부위도 익지 못했네
시원한 나무 그늘을 찾아 만수위로 위험수위로
차오를 때까지 나의 노래만 불렀네
남의 자리까지 차지하고 앉아
목쉬도록 노래하다
여름 끝까지 와버렸네
어쩔거나 어쩔거나 음풍농월로
젊은 날을 탕진해 버렸네
남의 것까지 거덜내 버렸네
문전박대 그 긴 겨울
시린 땅을 딛고 갈 마음의 신발
신발마저 벗겨져 세상하류까지 떠내려가 버렸네
그것도 모른 체 나부끼는 벽오동 나뭇잎으로
한여름 밤의 꿈에 부채질이나 했네
세상 언저리 언저리로만 떠돌았네
죽은 것마저 땅에 떨어져
한 줌 한 줌 거름기를 모을 때......
(김왕노·시인, 경북 포항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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